최규하(1919~2006)는 1979년 12월 21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이자 제4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외교관과 총리로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특히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사우디를 방문해 안정적 석유공급을 약속받아 오일쇼크를 넘기는데 공헌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민주화 세력들의 요구에 미적거리고,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5.18 민주항쟁과 유혈진압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낳았으며, 1980년 5월 신군부의 쿠데타로 퇴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그 후에도 현대사의 숱한 의혹에 비밀의 열쇠를 쥔 채 입을 열지 않고 영면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직면했던 어려움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생애
최규하 전대통령은 1919년 7월 16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41년 동아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광복 후에는 외교관으로서 활동했으며,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유엔 대표부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유엔에서 한국의 주권과 안보를 수호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는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당한 개입으로 패배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75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제4공화국을 선포하고, 비상계엄령을 발동한 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탁을 받아 국정을 주도하였고,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외교 분야에서는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특히 사우디와의 석유 협정, 미국과의 방위비 협상, 중국과의 단순외교관계 수립 등을 이끌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사망한 후,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국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신군부의 쿠데타 의혹에 둘러싸여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는데,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으며,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면서 퇴진을 강요받았고,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1988년 특사법으로 사면되었지만,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당시 현대사의 비밀과 진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2006년 8월 22일 폐암으로 별세하였습니다.
시대 정치적 상황
최규하 정부의 출범
1970년대 말에는 고속성장을 거듭한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회 및 경제적 위기가 발전되었고,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폭발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함께 강력한 통치기구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나라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은 통합은커녕 분열을 거듭했고 강한 응집력을 지닌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권은 공화당과 유정회로 양분되어 있었고, 공화당마저 총재로 선출된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당의 결속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분에 휩싸여 원내 제1당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통합을 이루지 못하기는 야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제각기 갈라서는 바람에 신민당은 양분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재야세력마저 둘로 나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진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기성 정치권과는 반대로 신군부 집단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굳게 결집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군부 내의 반대파들을 제거한 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구집단을 포함하여 동원 가능한 모든 역량을 결속해 놓았습니다.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1979년 12월 6일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최규하 정부는 성립 자체가 과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정당의 기반을 가진 정치인이 아닌 행정관료 출신인 최규하 대통령은 당연히 정당 개편을 주도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후 최규하 대통령은 공화당과 유정회 등 여권 관계자들을 만나 시국수습책을 협의하고, 1979년 11월 10일에는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개헌문제를 포함한 정치발전 문제는 신중하고 진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합헌적 절차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전제했으며,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확정했다고 언명했습니다. 1979년 12월 6일 실시된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사무처에 단독으로 등록한 최규하 대통령 후보는 찬성 2,465표, 무효 84표라는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아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2·12사태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해제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고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정치 환경의 급변 대신에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를 도모했는데, 이것이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사태의 본질이었습니다.
12・12 사태 후 신군부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이중권력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신군부는 권위주의적인 제반 요소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진통을 사회혼란으로 규정했고, 사회혼란에 따른 국가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1980년 5・17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 조치를 통해 신군부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강력한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 씨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정치활동에서 제거하고 국정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특히 신군부는‘5・18 광주 민주화 항쟁’ 소위 ‘광주 사태’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일명 국보위를 설치하여 당시 비극적인 광주 사태를 자신들의 권력탈취를 합리화하는 구실로 활용했습니다.
정치・사회・경제적인 혼란의 사전 방지와 계엄업무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5월 31일 관계법에 따라 국보위를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했으며, 이를 통해 전국비상계엄 하에서 행정부와 계엄당국 간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룩했고 계엄업무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당시 국보위의 의장은 대통령이 되고 그 운영은 대통령이 의제를 정하여 소집하고 주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외견상으로는 대통령이 국보위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국보위에 위임한 사항을 심의 조정하기 위해 국보위 산하에 상임위원회를 두었으며, 상임위원회는 13개 분과위원회를 통해 분야별 소관사항에 관한 기획・조정・통제업무를 관장했습니다. 결국 국보위의 제반 업무 자체를 상임위원장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국보위 설치는 신군부의 권력탈취를 합법화한 장치였으며, 아울러 국보위가 정부 밖에서 또 하나의 정부로 기능하는 대통령과 상임위원장이라는 이중권력구조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
출범 이후 국보위는 안보태세의 강화・경제난국의 타개・정치발전의 도모・사회악의 일소 등 4대 기본 목표를 제시했는데, 국가적 비상시국을 초래한 가장 무거운 책임이 기성 정치인에게 있기 때문에 부패・비리 정치인의 척결을 사회정화의 일차적인 작업으로 착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대중의 구속과 더불어 김종필과 김영삼 두 사람의 정계은퇴가 발표되었으며, 기존 정당구도에 대한 해체작업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치권의 교체와 궤를 같이하여 1980년 8월 16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직 사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국보위가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여 정치・사회풍토의 정화와 서정의 개혁과 쇄신 등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있고 정부와 계엄당국도 제반 임무와 시책을 착실하게 집행하고 있으며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질서와 안정을 되찾은 시점에서 국가발전을 위한 재도약을 설계해야 할 전환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국보위 설립과 동시에 형성되었던 이원적 권력구조는 해체됐고 전두환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적인 권력구조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로 간주되며, 당시의 정치적 변화와 긴장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최규하 특별 성명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책임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또한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야 애국충정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 자신의 거취에 관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는 오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대립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하고 불퇴전의 의지와 용기로 부강한 민주 국가를 건설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입각한 평화와 통일의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나가도록 간곡히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참고자료]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978318
임동욱, and 함성득. "잊혀진 최규하 대통령의 행정 리더십: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行政論叢 56.1 (2018): 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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