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은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어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한 비운의 대통령이다.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업적과 과오는 무엇이었을까? 이 글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의 생애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4대 대통령 윤보선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

약사

윤보선은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로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윤영규와 함께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외국어학교와 도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그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윤보선은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양 문명과 문화에 감탄하였으며, 특히 영국의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영국대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영국 정부와 교류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목소리를 알리려고 노력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에 무관심하였으며, 윤보선은 임시정부와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20년 임시의정원에서 사임하였으며, 그 후 영국에서 학문 연구와 강연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윤보선은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4월 10일에 열린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아산을 지역구로 하여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미군정의 부당함과 이승만의 독재적 행태를 비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적 방안을 주장하였고,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서울시의 행정과 재정을 개선하고, 시민 복지와 문화 활동을 증진시켰습니다.

 

윤보선은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50년 5월 30일에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재선되었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고발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전면전이 아닌 정치적 해결을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1952년 7월 20일에 열린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삼선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국회에서 이승만 정권의 개헌과 재선을 반대하였으며, 민주당의 대표로서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탄핵안을 무효화시키고,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윤보선은 이승만 정권과의 대립 속에서도 국민들에게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영국 신사'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바꾸지 않았으며,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학식과 품격이 뛰어난 문화인이기도 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독립운동가적인 정치인이라고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출생과 유년 시절

윤보선 대통령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 씨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 씨 이재룡 씨의 장녀인 이범숙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 10세까지 99칸의 대저택에서 살았으며, 이후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8번지 주택(서울시 민속자료 제27호) 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고 한다. - [출처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 생가 - 대통령기록관

 

경무대에서 청와대로의 명칭 변경

1945년 광복 후에 2년여 기간은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이화장에서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고 1층은 집무실, 2층은 관저로 사용했습니다. 1960년 8월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라는 명칭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하여 1961년부터 이름을 청기와를 덮었다는 의미에서 청와대로 바꾸었습니다.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1입니다. 북악산을 뒤에 두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사무실이 밀집한 도심지역의 북쪽에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청와대의 주소가 ‘광화문 1번지’로 처음 정해졌고,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1월 1일에 한국식 주소인 ‘세종로 1번지’가 되었습니다. 2014년에 도로명 주소 체계로 바뀌면서 지금의 주소가 되었습니다.

 

훗날, 윤보선 대통령은 그날의 기억을 기록하며 취임 첫해에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고친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경무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총독의 관저였고 자유당 때 독재체제를 강화한 곳이어서 오명의 잔영을 씻어버리고 싶었다.

이후 청와대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에는 청와대 기구가 확대됨에 따라 건물의 보수·증축과 함께 상춘재, 영빈관 신축 등 건물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위상과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밝고 진취적인 청와대를 새로 짓기로 하여 1991년 9월 현재의 본관을 신축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조선총독이 기거했던 구 본관 건물이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집무하였고,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청와대는 국민에게 전면 개방되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11월 1일에 제5차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의 범위를 확대하고, 지방의회의 선거제도를 개선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자립성을 강화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을 확대하였습니다.
1960년 6월 15일에 공포된 제2공화국 헌법에서 양원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는 상원을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하고, 하원을 정부의 책임기관으로 하여 국회의 역할과 기능을 분화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선거제도와 임기를 달리하여 국회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려고 하였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건강법

윤 대통령은 꼭 잡곡밥을 먹었다. 쌀이 아주 귀했던 시절에도 충분히 흰쌀밥만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밥만은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먹었다. 이런 식사 습관은 그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로 꼽힌다. 또 하나의 규칙은 평생 술을 멀리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의 집에서 쓰는 술잔이 유난히 크기가 작았던 것도 술을 적게 마시기 위해서였다. 윤보선 대통령의 집안은 장수를 누리기로 유명했는데 고종황제가 가문에 내린 글귀에서 오래된 건강법을 짐작할 수 있다.

 

節食 服茶 羞可 少病 (절식 복다 수가 소병)
적게 먹고 차를 마시며 음식을 조절하면 병이 적다

 

윤보선 대통령의 재임 기간, 대통령의 음식을 책임진 요리사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새로운 정부의 살림에 기틀이 잡히기도 전에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취임사에 담은 자신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윤보선 대통령은 1년 7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네이버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