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1대, 12대 대통령 전두환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8세까지 유년 시절을 보내고, 대구로 이주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진하여 국군으로 참전했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고, 1970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9년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1980년 5.17 비상계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책임졌다. 이후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단임제를 도입하여 제12대 대통령에 재선 되었다. 그는 선진국형 국토개발과 문화산업 육성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동시에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탄압하고, 부패와 비리를 저질렀다고 평가된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민주화 선언을 하고, 후임으로 노태우를 지명하였다. 퇴임 후 구속 기소되어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되었다.

전두환 그는 역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로, 일부에서는 국가발전과 안보유지에 공헌한 리더로 칭송하지만, 다수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국민을 분열시킨 독재자로 비난하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

정치적 성장과정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했다. 그는 하나회의 지도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신뢰를 얻었고,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함께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는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어 박정희의 오른팔로 활동했다. 그는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고, 군부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군사반란과 군부독재

전두환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저격당한 사태를 계기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당시 국정 책임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군부의 통치를 시작했다.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을 겸직하고,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며, 수백 명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는 이후 국가보위위원회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단임제를 도입하여 제12대 대통령에 재선 되었다. 

전두환은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새질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선진국형 국토개발과 문화산업 육성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선진국형 국토개발과 문화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전두환은 한강개발사업을 통해 서울시내 잦은 범람 등을 해결하고, 도시의 경관과 환경을 개선했고, 역사청산을 통해 극일과 반공으로 국민통합을 추구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일본을 극혐 했다고 한다.

야간통행금지와 두발규제를 폐지하고, 학력고사와 학원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여 자유주의를 실천했고. 스포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창설하였으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했다.

문화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컬러텔레비전과 광케이블을 보급하고, 영화와 팝 음악을 장려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3S 정책이란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일본과 대한민국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배기"정책의 통칭입니다. 이 정책은 대한민국에서는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가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돌려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여러 우민화 정책들을 묶어 이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3S 정책의 기점은 1981년 5월 28일부터 시작한 ‘국풍 81’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국풍 81’의 국고보조금, 예산 책정 등이 1980년 9월경에 태동되었으므로 결국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된 1980년 9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국풍 81’은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KBS에서 주관하면서 판을 벌여 국민들의 저항의식을 크게 꺾어놓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프로스포츠와 프로씨름, 농구대잔치, 한국배구슈퍼리그 등의 스포츠 산업을 육성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포르노 영화와 팝 음악을 장려하는 3S 정책을 계속하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 탄압

전두환은 선진국형 국토개발과 문화산업 육성 등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침해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수백 명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는 이후 국가보위위원회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단임제를 도입하여 제12대 대통령에 재선 되었다.  그는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새 질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는 민주화 운동가들과 인권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사형시켰다.  그는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비밀경찰과 감시망을 구축하여 국민의 의사표현과 사생활을 억압했다.  그는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부패와 비리를 저질렀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을 특혜로 취급하고,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정치적 거래를 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의 압력에 따라 외교정책과 안보정책을 수립했다.

민주화 선언과 후임 지명

전두환은 1987년 6월 항쟁에 따라 민주화 선언을 하고, 후임으로 노태우를 지명했다.  그는 민주화 선언에서 직접선거제와 헌법개정, 정치개혁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국민의 요구와 다르고, 군부의 통치를 계속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후임으로 노태우를 지명하면서,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건을 달았다. 그는 노태우와 함께 6월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처벌을 계속했다. 

퇴임 후 구속 기소와 사면

전두환은 1988년 2월 퇴임한 후,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정치와 경제에서 배제하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책임에 대해 부인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1995년 12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96년 5월 대통령 특사를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출소하였다. 

전두환의 역사적 평가

전두환은 역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로, 일부에서는 국가발전과 안보유지에 공헌한 리더로 칭송하지만, 다수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국민을 분열시킨 독재자로 비난한다.  그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나, 동시에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저해하고, 국민의 희생과 고통을 야기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청산하고, 극일과 반공으로 국민통합을 추구했으나, 동시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극우와 친미로 국민분열을 조장했다. 그는 한국의 스포츠와 문화산업을 육성하고, 자유주의를 실천했으나, 동시에 한국의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비밀경찰과 감시망으로 국민의 의사표현과 사생활을 억압했다. 

전두환은 한국의 역사에서 잊히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으나, 부정적인 역할도 하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존경받는 인물도 되었으나, 혐오받는 인물도 되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배울 점도 있으나, 배울 점이 아닌 점도 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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