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 3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생애는 한국의 현대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하였으며,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는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노력과 헌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초대 취임 사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사진 - 대통령 기록관

출생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양반 가문 출신인 이경선 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어린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가족과 함께 1877년에 고향을 떠나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라고 한다.

[출처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학력

졸업년도 학교명 학위
1885 배재학당  
1907 미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1908 미 하버드 대학교 석사
1910 미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

 

주요 연표

년도 내용
1896 협성회보 주필
1898 독립협회 사건으로 7년간 옥고
1904 석방, 미국으로 건너감
1912 세계감리교대회 한국대표
1913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 창간
1917 호놀룰루에 한인기독학원 설립
1919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1925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사임. 미국서 독립운동
1945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1948 제헌국회의장, 초대 대통령 취임
1951 자유당 총재
1952 ~ 1956 제2대 대통령
1956 ~ 1960 제3대 대통령
1960 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 망명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사진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사진 - 대통령 기록관

주요 정치적 업적

이승만 대통령(1948년 - 1960년)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다양한 업적을 남긴 인물 중 하나입니다.

1.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군사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북한의 남침에 대한 방어를 보장했습니다.

2. 교육정책: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여자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를 설립하였고,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국민 교육을 확대하고 민주주의를 촉진하였습니다.

3. 독재와 논란: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 및 대통령 연임 제한 폐지와 같은 조치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독재적 통치로 비판받는 요인이 되었고,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4. 4.19 혁명: 1960년 4월,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와 불만을 반영하는 시민 운동이 발생하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퇴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민주주의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안보를 강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민주주의 억압으로 논란을 빚었습니다. 그의 역사와 업적은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엇갈리는 의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에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확보하고 북한의 추가적인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한국 또는 미국이 군사적으로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측은 즉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7일에 미국 브릭스 대사와 회동을 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상호 방위 조약에 대한 진전이 극히 미미하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만 5천 명의 반공 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시켰습니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력히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였습니다.
1953년 8월 3일부터 협상에 들어가서 1953년 8월 8일에 그 최종안을 서울에서 가조인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크게 만족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후, 워싱턴 D.C.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인하였고, 비준서 교환은 여의치 않았으나,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끈질기게 요구했다"…서한으로 살펴본 이승만 | 연합뉴스

(세종=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서 '이승만 대통령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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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19 혁명의 결과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며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으며, 국민의 분노와 지탄에 항복하여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성명에서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선거를 다시 하겠으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야 직후인 1960년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1965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숙소와 생활비 등을 제공한 교민에게 자신이 한국에서 거주했던 서울 종로구 이화동 소재 사저 '이화장’을 위임한다는 위임장까지 써줬다고 합니다.
그의 생활은 곤궁했으며,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한국 정부의 귀국 불허 방침 때문에 좌절되었습니다. 결국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하와이에서 서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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