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5대 ~ 9대 대통령 박정희

2023년 10월 27일 by m-moti

    목차 (Content)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근대화와 발전의 아버지, 경제 기적의 조성자, 강인한 리더십의 상징으로 칭찬한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독재자, 민주주의 적, 인권 침해자로 비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의 업적과 과오는 무엇이었을까? 이 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와 역할,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살펴보겠다.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 대통령 기록관

박정희 대통령 약사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제5대, ~ 제9대 대통령으로서 1962년 3월부터 1979년 9까지 18년간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제 강점기에 군인으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 육군에 재입대하여 여러 전쟁과 사건에 참여하였습니다.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위원장이 되었고, 1963년에는 민정 복귀를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 수출 중심의 산업화 정책과 한미동맹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그의 정부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을 평균 8.6%로 끌어올려 세계적인 경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하려고 하였고, 1972년에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언론과 학생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1979년 10월에는 부산·마산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의 반발이 커졌고,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구이자 한국 중앙정보부 (KCIA)의 김재규 부장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유년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박씨 박성빈씨와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박성빈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몰락 양반이었지만 부유한 계층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 백남의는 당시의 농촌 여성들과 달리 권위적인 남편에게 종속적이지 않으면서, 강직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지녔다고 합니다. 백남의에 대한 상모리 사람들의 평가는 '자존심이 대단한 여자', '독하면서도 가냘픈 여자', 가난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불평 한마디 없이 동그란 돋보기를 쓰고서 언문 소설을 즐겨 읽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소년 시절"이라는 책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어머니 백남의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기술하고 있는데, 자녀에게 헌신하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양가의 규수로 태어나서 출가 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별로 모르고 자랐으나 출가 후는 계속된 고생 속에서도 우리 7형제를 남 못지 않게 키우시느라 모든 것을 바치셨다
학교를 다니는 나보다 더 고생을 하시는 분이 어머니이시다. 시계도 없이 새벽 창살을 보고 일어나서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다음에 나를 깨우신다. 겨울에 추울 때는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방안에까지 들고 와서 아직 잠이 덜 깬 나를 세수시켜 주시고 밥을 먹여주신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도 어머니께서는 늘 그 장소에 나와 계시다가 더 늦을 때에는 동네 어귀 훨씬 밖까지 형님들과 함께 나오셔서 "정희 오느냐" 하고 부르시면 "여기 가요"하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가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은 매번 성적이 일등이었으며 3학년 부터는 내리 급장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 최초로 명문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생가에 대해 쓴 [나의 소년 시절]에 의하면

이 집은 6·25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박정희 대통령 생가,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 대통령기록관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에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 온정리에서 正熙 씀 -

 

모든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나의 꿈은 위대한 군인이 되는 것이기에 나는 군인이 되었다. 내가 장군이 되자 나의 꿈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군사혁명 후에 나의 소망은 나의 조국을 더욱 번영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꿈과 희망은 생애에 있어 그의 위치에 따라 '변화한다'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나의 꿈과 희망은 나의 지위가 '해가 갈수록 변화함에 따라' 더욱 거대하고 위대하게 커갔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으며, 내 생애에 무엇이 되려고 했는지를 언제 의식했었노라고 얘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Le Figaro  편집인과의 인터뷰, The Korea Herald 1978년 10월 28일

 

 

육영수 여사와의 만남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 대통령 기록관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는 육영수 여사와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은 출신 배경이나 사회 통념상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지만, 일단 결혼하게 되자 그렇게 잘 어울리는 천생연분일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꼭 맞는 배필이었으며, 그가 쿠데타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영부인으로서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녀는 "청와대 안의 야당" 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내조에 전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라고 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훗날 박정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서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검푸른 숲 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 설레어라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댓글